7000억 달러 클럽 가입, 77년 만의 쾌거
2025년 대한민국은 수출 7,040억 달러(약 1,033조 원)를 기록하며 무역 역사상 처음으로 7,000억 달러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77년 만의 쾌거입니다. 전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7,000억 달러 수출국 반열에 오른 것이며, 글로벌 경기 둔화와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도 한국 제조업의 저력을 보여준 성과입니다.
정부는 이 기세를 이어 2026년에도 2년 연속 7,000억 달러 수출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세계 수출 순위에서도 프랑스를 제치고 5위권을 위협하는 위치에 올라섰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총액 뒤에는 우려스러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외화내빈의 민낯, 무역수지의 착시
역대 최대 수출에도 불구하고 수입 역시 6,300억 달러에 육박해, 무역수지 흑자는 740억 달러에 그쳤습니다. 이 숫자는 수출 규모가 훨씬 작았던 과거 호황기 시절의 흑자 폭보다 오히려 줄어든 수치입니다.
많이 팔았지만 남는 장사를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고환율로 인해 수입 비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특히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 구조상 유가 변동에 취약한 수익성 구조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반도체 없으면 마이너스, 편중의 위험성
이번 실적의 일등 공신은 단연 반도체입니다. 반도체 수출이 전체의 20% 이상을 차지하며 성장을 견인했습니다. 문제는 반도체를 빼면 나머지 산업의 성적표가 처참하다는 점입니다.
경제계에서는 이를 반도체 착시라고 부릅니다. 특정 품목 하나가 전체 통계를 왜곡시켜 경제 전반의 부진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도체 경기가 꺾이면 한국 경제 전체가 추락할 수 있는 외발통 경제의 위험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2025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전년 대비 15.5% 증가한 7,755억 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AI 산업 성장과 메모리 가격 상승 덕분입니다. 하지만 이 호황이 언제까지 갈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만 웃고, 중소기업은 눈물
수출 성과의 온기가 대기업에만 머물고 중소기업으로는 퍼지지 않는 양극화 현상도 심화되었습니다. 반도체, 조선 등 대규모 장치 산업 위주의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지만, 부품과 소재를 납품하는 중소기업들은 원가 상승과 납품 단가 인하 압박으로 고사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수출의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가 실종되면서 내수 경기와의 디커플링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수출 기업은 호황인데 골목 상권은 불황인, 두 개의 경제가 공존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긍정적인 신호도 있습니다. 2025년 중소기업의 수출 규모와 참여 기업 수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며 수출 기반이 확대되었습니다.
AI가 불지핀 반도체 슈퍼 사이클
2025년 반도체 수출이 전년 대비 19.8% 급증한 핵심 동력은 인공지능(AI) 혁명입니다. 챗GPT 이후 전 세계 빅테크 기업들이 AI 데이터센터 구축 경쟁에 뛰어들면서, 여기에 필수적인 고대역폭 메모리(HBM)와 DDR5 D램 수요가 폭발했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없어서 못 팔 정도의 호황을 누렸고, 이는 수출 단가 상승으로 이어져 전체 실적을 견인했습니다.
하지만 벌써부터 시장 일각에서는 2026년 하반기부터 메모리 반도체 경기가 하강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는 피크 아웃(Peak-out) 우려가 제기됩니다. AI 투자가 과열 양상을 보이다가 조정기에 들어가거나, 중국 업체들의 레거시(구형) 반도체 물량 공세가 시작되면 가격 하락 압력이 커질 수 있습니다.
중국의 추격, 미중 사이 줄타기
중국은 미국의 제재 속에서도 반도체 자립을 위해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낸드플래시 등 일부 분야에서는 한국과의 기술 격차를 턱밑까지 추격했습니다.
미국이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를 강화하면서, 중국 공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영 불확실성은 여전합니다. 미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지정학적 리스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입니다.
조선업의 부활, 28.6% 성장
반도체와 함께 2025년 수출을 이끈 또 하나의 축은 조선업입니다. 전년 대비 28.6%라는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카타르 프로젝트 등 대규모 LNG 운반선 수주 물량이 본격적으로 인도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조선사들은 친환경 선박 기술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며, 중국의 저가 수주 공세를 기술력으로 따돌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배를 만들 사람이 없어 아우성입니다. 조선업 불황기에 떠난 숙련공들이 돌아오지 않고, 청년들은 힘든 일을 기피하면서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 투입을 늘리고 있지만 숙련도와 소통의 어려움 등으로 생산성 향상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철강과 석유화학, 추락하는 제조업의 허리
대한민국 산업화의 상징이자 제조업의 허리였던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은 2025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습니다. 철강 수출은 8.8% 감소했고, 석유화학은 11.7%나 급감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중국입니다. 중국 내 부동산 경기 침체로 철강 수요가 급감하자, 중국 철강사들은 남는 물량을 헐값에 해외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밀어내기식 저가 수출로 인해 글로벌 철강 가격이 폭락했고, 한국 기업들은 가격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석유화학 역시 중국이 대규모 증설을 통해 자급률을 100% 이상으로 끌어올리면서 최대 수출 시장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경기 사이클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내에서 한국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등 선진국의 환경 규제도 거대한 무역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탄소 배출량이 많은 이들 산업은 막대한 탄소세를 물어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자동차와 배터리, 브레이크 걸리다
지난해까지 수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던 자동차 산업도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완성차 수출은 전년 대비 2% 성장에 머물렀습니다. 고금리 장기화로 글로벌 신차 수요가 둔화되었고, 펜트업 수요가 해소되면서 판매 증가세가 꺾였습니다.
미래 먹거리로 기대를 모았던 이차전지(배터리) 산업은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의 늪에 빠졌습니다. 수출액이 11.8%나 감소하며 두 자릿수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전기차 가격 부담과 충전 인프라 부족 등으로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서 배터리 주문량이 급감했습니다.
가성비를 앞세운 중국의 LFP(리튬인산철) 배터리가 글로벌 시장을 장악해 나가고 있습니다. 테슬라를 비롯한 주요 완성차 업체들이 원가 절감을 위해 한국의 NCM(삼원계) 배터리 대신 중국산 LFP 배터리 채택을 늘리고 있습니다.
수출 시장 다변화, 밝은 징조
어두운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25년 한국 수출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시장 다변화입니다. 미국과 중국에 편중되었던 수출 시장이 아세안, 유럽연합(EU), 중남미 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5대 주력 수출 품목 중 10개 품목의 수출이 증가했으며, 9대 주요 지역 중 미국을 제외한 8개 지역에서 수출이 증가했습니다.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은 통상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성과입니다.
바이오와 고부가가치 산업, 그리고 한류 확산에 힘입은 식품과 화장품 등 소비재 분야도 새로운 수출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이제는 얼마나 많이 파느냐보다 얼마나 남기느냐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매출액 중심의 양적 성장에서 부가가치 중심의 질적 성장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합니다.
프리미엄 제품과 브랜드 파워로 승부하고, 서비스와 솔루션을 융합하여 수익성을 높여야 합니다. 반도체 착시와 무역 양극화라는 경고음을 무시한다면 잃어버린 30년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습니다.
2026년은 위기 극복의 DNA를 발휘할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저성장 고착화와 재도약의 갈림길이 놓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