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0만 개인정보 유출, 그리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쿠팡에서 물건을 샀다. 로켓배송이 편해서 자주 이용했다. 새벽에 주문하면 아침에 도착하는 그 마법 같은 서비스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문자가 왔다.
“고객님의 개인정보가 유출되었습니다.”
내 이름, 이메일, 배송지 주소, 공동현관 비밀번호가 어딘가로 흘러갔을 수 있다. 누군가 내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소름이 돋았다.
3,370만 명. 대한민국 성인 4명 중 3명에 해당하는 숫자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다. 분노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다.
쏟아지는 비난과 ‘보여주기식’ 대응
언론은 쿠팡을 때린다. 매일 새로운 기사가 쏟아진다. 국회는 6개 상임위원회가 연합해 연석청문회를 연다. 더불어민주당은 ‘김범석 입국금지법’을 발의한다. 유승준처럼 영구 입국금지시키겠다는 것이다. 집단소송 온라인 카페에는 65만 명 이상이 몰렸다. 모두가 쿠팡을 향해 돌을 던진다.
쿠팡은 뒤늦게 보상안을 발표했다. 1인당 5만 원, 총 1조 6,850억 원 규모라고 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선제 보상이라며 홍보했다. 그런데 막상 열어보니 실체는 달랐다. 쿠팡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금액은 5,000원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쿠팡 트래블에서 2만 원, 쿠팡 알럭스(명품관)에서 2만 원, 쿠팡이츠에서 5,000원이었다.
쿠팡 트래블? 쿠팡 알럭스? 대부분의 소비자는 그게 뭔지도 모른다. “보상안이라 쓰고 마케팅이라 읽는다”는 비아냥이 나왔다. 피해자들은 분노했다. “개인정보 털어먹고 쿠폰 쏜다고 해결되냐”는 반응이 쏟아졌다.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은 국회 청문회 출석을 거부했다. ‘해외 비즈니스 일정’을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국회는 그를 국회증언감정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동행명령장 발부, 국정조사, 심지어 입국금지까지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분명히 해두자. 쿠팡은 잘못했다.
전직 직원 한 명이 약 5개월간 고객 데이터에 무단으로 접근했다. 쿠팡은 그것을 탐지하지 못했다. 11월 18일 협박 메일을 수신한 후에야 유출 사실을 인지했다고 밝혔다. 5개월이다. 반년 가까이. 그 기간 동안 3,370만 명의 정보가 무단으로 접근당했다. 이것은 심각한 보안 관리 소홀이다.
유출 사실을 인지한 후에도 쿠팡의 대응은 문제가 많았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쿠팡의 최초 통지 내용이 부정확하다며 7일 이내 수정 재통지를 요구했다. 경찰은 쿠팡의 ‘셀프 포렌식’이 수사 협조 없이 진행됐다며 증거 훼손 가능성을 우려했다. 쿠팡이 12월 25일 발표한 성명서의 국문본과 영문본 뉘앙스가 달랐던 것도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였다.
쿠팡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과징금을 내야 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하고, 보안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도둑이 들었을 때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은 집주인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것은 맞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광경을 보라.
도둑을 잡으려는 노력보다, 집주인을 공개 처형하는 데 모든 에너지가 쏠리고 있다. 언론은 매일 쿠팡의 새로운 ‘죄목’을 발굴한다. 국회는 청문회를 열어 호통을 친다. 국민은 집단소송 카페에 몰려든다. 모두가 쿠팡을 향해 돌을 던지느라 바쁘다.
그 사이 정작 중요한 질문은 묻히고 있다.
왜 이런 일이 17년째 반복되는가?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 도둑이 들지 않도록 동네 전체의 방범 시스템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17년째 반복되는 ‘도돌이표’ 역사
한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옥션 해킹 사건이 있었다. 1,800만 명의 개인정보가 털렸다. 14만 6,000여 명이 집단소송에 참여했고, 소송가액은 1,570억 원에 달했다. 결과는? 대법원은 “옥션에 배상책임 없다”고 판결했다. 피해자들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네이트·싸이월드 해킹 사건도 있었다. 3,50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당시 대한민국 전 국민의 7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결과는? “SK커뮤니케이션즈에 배상책임이 없다.” 피해자들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카드3사 사건은 더 충격적이었다. KB국민카드, NH농협카드, 롯데카드에서 총 1억 580만 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 이번에는 법원이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 얼마를 받았을까? 1인당 10만 원. 그것도 몇 년간의 소송 끝에야 받을 수 있었다.
인터파크 사건, LG유플러스 사건, 올해 초 터진 SK텔레콤 유심 해킹 사건까지. 그리고 이제 쿠팡이다.
17년이 지났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개인정보는 계속 털리고, 기업은 과징금 몇십억 원 내고 넘어가고, 피해자들은 10만 원 받거나 한 푼도 못 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다음 타깃을 찾아 분노한다.
그때도 언론은 해당 기업을 때렸다. 국회는 청문회를 열었다. 국민은 분노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면 잊었다. 시스템은 바뀌지 않았다.
쿠팡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껌값’ 과징금과 기업의 비용 계산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유출된 개인정보는 총 1억 916만 4,950건이다. 같은 기간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부과한 과징금 총액은 약 3,600억 원 수준이다. 계산해 보면, 건당 과징금은 약 3,300원에 불과하다.
내 정보 한 건이 3,300원이다.
미국은 어떤가.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페이스북(현 메타)에 50억 달러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우리 돈으로 약 5조 9,000억 원이다. 에퀴팩스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서는 7억 달러의 합의금이 책정됐다.
한국은? SK텔레콤에 부과된 1,348억 원이 역대 최대다. 현행법상 수조 원이 부과될 가능성은 없다. 그렇게 부과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기업 입장에서 과징금은 ‘비용’에 불과하다. 보안에 투자하는 것보다 유출 후 과징금을 내는 것이 더 저렴하다면, 누가 보안에 투자하겠는가?
그런데 이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 보도가 얼마나 있는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을 촉구하는 국회의원이 몇이나 되는가?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감독 역량 강화를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리는가?
쿠팡 때리는 기사는 넘쳐난다. 클릭이 되니까. 시스템 개선을 요구하는 기사는 찾기 어렵다. 클릭이 안 되니까.
청문회: 해법 없는 ‘호통 쇼’
국회는 쿠팡 사태에 대응해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연석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사상 초유의 대규모 청문회다. 표면적으로는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질문해 보자. 이 청문회의 목적은 무엇인가?
한국의 국회 청문회는 언제부터인가 ‘해법을 찾는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를 호통 치는 자리’가 됐다.
의원들은 마이크 앞에 앉아 증인을 향해 고성을 지른다. 카메라가 돌아간다. 그 장면이 뉴스에 나간다. 유튜브에 올라간다. “누가 누구를 호되게 질책했다”, “누가 누구를 벙어리로 만들었다”는 제목이 붙는다. 조회수가 올라간다. 의원의 지지도가 올라간다.
청문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진실을 밝히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청문회에서 그런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미국 청문회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검증 시스템과 기간의 제약이 없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인사청문회 전에 FBI, 국세청(IRS), 공직자윤리위원회 등이 동원돼 후보자를 철저히 검증한다. 233개 항목을 2주간에 걸쳐 조사한다. 미국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청문회에서는 대부분 정책과 국무부의 운영 방안, 미국의 해외 정책에 대한 질문이 주로 이루어졌다.
한국은? 의원들이 직접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의 상당수가 이미 답을 정해놓은 수사적 질문이다. “당신이 잘못한 거 맞죠?”, “국민을 기만한 거 아닙니까?”, “반성하십니까?” 이런 질문에 무슨 답을 기대하는가.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선고다.
의원들에게 청문회는 자신을 알릴 기회다. 국민 앞에서 “나는 정의롭고, 저 증인은 나쁜 사람”이라는 그림을 그릴 기회다. 그 장면이 뉴스에 나가고, SNS에 퍼지고, 지지자들이 환호한다. 다음 선거에서 표가 된다.
그래서 의원들은 경쟁적으로 더 센 목소리를 낸다. 더 강하게 질책한다. 더 날카롭게 공격한다. 누가 증인을 더 곤경에 빠뜨리느냐가 경쟁의 기준이 된다. 해법을 찾는 것은 관심 밖이다.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은 흥미롭지 않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때리는 장면’이니까.
쿠팡 청문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의원들은 쿠팡 관계자들을 향해 고성을 지를 것이다. “어떻게 3,370만 명의 정보를 5개월간 털리고도 몰랐습니까!”, “국민을 우롱하는 겁니까!”, “반성하십니까!” 카메라가 그 장면을 잡을 것이다. 뉴스에 나갈 것이다. 유튜브에 올라갈 것이다. 의원들의 지지도가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청문회가 끝난 후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왜 전직 직원 한 명이 5개월간 3,370만 명의 정보에 접근한 것을 탐지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기술적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현행 ISMS(정보보호관리체계) 인증 제도의 허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전문적 논의는 없을 것이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감독 역량을 어떻게 강화할지에 대한 대안은 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언제 도입할지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청문회는 끝나고, 의원들은 각자의 지역구로 돌아가고, 쿠팡은 과징금을 내고, 피해자들은 몇 년 후에 10만 원쯤 받거나 못 받을 것이다.
진짜 청문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밝히고,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가”를 논의하는 자리여야 한다. 진정한 책임 추궁은 구체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5개월간 비정상적인 데이터 접근을 탐지하지 못한 기술적 원인은 무엇입니까?”, “현행 ISMS 인증 기준에서 이 사고를 막지 못한 허점은 무엇입니까?”,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정기 점검에서 왜 이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습니까?”,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도입 시 예상되는 효과와 부작용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의원이 몇이나 될까. 이런 질문은 뉴스에 나오지 않는다. 유튜브 조회수도 올라가지 않는다. 호통 치는 장면만큼 ‘좋아요’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의 청문회는 변하지 않는다. 호통 치는 것이 표가 되는 한.
김범석이 청문회에 출석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의원들이 그를 향해 “왜 안 나왔습니까!”, “국민을 무시하는 겁니까!”라고 소리치면 개인정보 유출이 막아지는가. 그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면 내 공동현관 비밀번호가 안전해지는가.
청문회의 목적이 분노 해소라면, 그것은 청문회가 아니라 집단 치료 세션이다. 청문회의 목적이 의원들의 정치적 이익이라면, 그것은 청문회가 아니라 선거 운동이다.
언론과 대중의 빗나간 분노
언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권력을 감시하고, 진실을 밝히고, 공론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쿠팡 비판 기사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쏟아진다. 김범석의 자산, 그의 가족, 그의 과거 발언, 쿠팡의 노동환경, 쿠팡의 로비 의혹. 온갖 각도에서 쿠팡을 파헤친다. 독자들이 클릭한다. 광고 수익이 올라간다.
그런데 “왜 17년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가”를 묻는 기사는 얼마나 있는가. “정부의 개인정보 보호 정책은 실효성이 있는가”를 추적하는 탐사보도는 얼마나 있는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왜 아직도 도입되지 않았는가”를 따지는 기획기사는 얼마나 있는가.
거의 없다. 클릭이 안 되니까.
언론은 쿠팡을 때리면서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언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쿠팡 한 기업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지 시스템의 문제를 파헤치는 것이다.
도둑이 든 집이 있다. 언론이 할 일은 그 집주인의 과거 행적을 캐고, 집주인이 평소에 문단속을 어떻게 했는지 폭로하고, 집주인의 인격을 의심하는 기사를 쓰는 것인가. 아니면 동네 전체의 방범 시스템이 왜 허술한지, 경찰은 왜 순찰을 제대로 하지 않는지, 도둑을 처벌하는 법이 왜 이렇게 약한지를 추적하는 것인가.
지금 언론은 전자에 몰두하고 있다. 후자는 관심 밖이다.
‘멍석말이’를 멈추고 시스템을 바꿔야 할 때
국민의 분노도 마찬가지다.
집단소송 카페에 65만 명이 모였다. 1인당 100만 원씩 배상받으면 65조 원이다. 변호사들은 “역대급 소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를 보라.
옥션 14만 6,000명, 전원 패소. 한 푼도 못 받았다. 네이트 수만 명, 전원 패소. 한 푼도 못 받았다. 카드3사 수십만 명, 1인당 10만 원. 그것도 몇 년간의 소송 끝에.
쿠팡 소송도 비슷한 결과가 날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전수조사에서 2차 피해 의심 사례를 현재까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법원이 “구체적 피해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배상 책임을 부정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집단소송에 참여한 65만 명은 몇 년 후에 무엇을 얻을까. 아마도 10만 원. 그것도 받으면 다행이다.
그 에너지를 어디에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 쿠팡 집단소송에 참여하는 것과, 국회의원에게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라”고 압박하는 것 중에 무엇이 더 효과적일까.
물론 둘 다 해야 한다. 쿠팡에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같은 일이 반복된다. 쿠팡에서 10만 원 받고 끝나면, 내년에 또 다른 기업에서 정보가 털릴 때 또 집단소송에 참여해야 한다. 또 몇 년 기다려서 또 10만 원 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인가.
과거 대형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서 대주주가 청문회에 출석한 적이 있는가?
카드3사 사태 때 KB금융, 농협금융, 롯데의 대주주가 출석했는가? 네이트 사태 때 SK그룹의 대주주가 출석했는가? SK텔레콤 사태 때 최태원 회장이 청문회에 불려갔는가?
쿠팡에 대한 대응이 유독 강경하다면, 그것은 쿠팡이 다른 기업보다 더 큰 잘못을 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쿠팡이 ‘때리기 좋은’ 타깃이기 때문인가?
쿠팡은 미국 법인이다. 김범석은 미국 국적자다. 한국에 거주하지 않는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국내 재벌 총수들에게는 쉽게 꺼내지 못하는 압박을 쿠팡에는 가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도 쿠팡은 ‘안전한’ 타깃이다. 쿠팡을 때려도 정치적 반발이 크지 않다. 오히려 인기를 얻을 수 있다. SK나 삼성을 같은 강도로 때리면? 그것은 다른 이야기다.
쿠팡에 대한 비판이 격렬한 이유 중 하나는 쿠팡이 그동안 쌓아온 부정적 이미지다. 물류센터 노동자 사망 사고, 하도급 갑질 의혹, 언론 상대 소송, 고위 공무원 영입 논란. 이러한 ‘업보’가 이번 사태에서 폭발적인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노동환경 문제와 개인정보 유출은 별개의 이슈다. 하도급 갑질과 보안 관리 소홀도 별개다. 과거의 잘못이 현재의 사건에 대한 과잉 비판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쿠팡은 나쁜 기업이니까 마음껏 때려도 된다”는 논리는 위험하다.
쿠팡이 잘못했으니 비판받아야 한다. 그것은 맞다. 그러나 쿠팡’만’ 비판하고 끝나면 안 된다. 시스템의 문제를 함께 지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매번 새로운 ‘나쁜 기업’을 찾아 돌을 던지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김범석은 ‘대주주’이지 ‘대표이사’가 아니다.
그는 한국 법인의 등기이사·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현재 한국 법인의 대표이사는 별도로 존재한다. 미국 델라웨어에 설립된 Coupang, Inc.가 최상위 지주회사이고, 김범석은 그 이사회 의장이다. 클래스B 주식을 통해 약 70% 이상의 의결권을 보유하고 있어 실질적 지배자임은 분명하다.
국회증언감정법은 “국회에서 증인으로서의 출석 요구를 받은 때에는 누구든지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법적으로 김범석에게도 출석 의무가 있다. 그가 출석을 거부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질문해 보자. 김범석을 입국금지시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유승준을 입국금지시킨 것은 병역 기피에 대한 사회적 제재였다. 김범석을 입국금지시키는 것은 무엇에 대한 제재인가. 청문회 불출석? 그것이 병역 기피만큼 중대한 사안인가.
물론 국회를 무시한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입국금지라는 극단적 조치가 적절한 대응인가. 그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조치인가, 아니면 정치적 쇼를 위한 조치인가.
김범석이 입국금지되면 언론은 대서특필할 것이다. 국민은 통쾌해할 것이다. 의원들은 “우리가 해냈다”고 자축할 것이다.
그리고 개인정보 유출은 계속될 것이다. 시스템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늘 이런 식이다.
사건이 터지면 분노한다. 언론이 특정 기업이나 인물을 집중 조명한다. 국회가 청문회를 연다. 시민들이 집단소송에 참여한다. SNS에서 비판이 쏟아진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면 잊는다. 다음 사건이 터지면 다시 분노한다. 또 다른 타깃을 찾아 돌을 던진다.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 법은 개정되지 않는다.
옥션 피해자들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네이트 피해자들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카드3사 피해자들은 10만 원을 받았다. 쿠팡 피해자들은 얼마를 받을 것인가? 아마도 비슷할 것이다.
그 사이 또 다른 기업에서 또 다른 유출 사고가 터질 것이다. 우리는 또 분노할 것이다. 또 다른 청문회가 열릴 것이다. 또 다른 집단소송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시스템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쿠팡을 때리는 것은 쉽다. 김범석을 입국금지시키자고 외치는 것은 쉽다. 집단소송에 참여하는 것도 쉽다.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라고 국회를 압박하는 것은 어렵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감독 역량을 강화하라고 정부를 압박하는 것은 어렵다. ISMS 인증 제도를 실질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쉬운 것만 하고 있다.
비판만 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현재 과징금은 기업에게 ‘비용’에 불과하다. 보안에 투자하는 것보다 유출 후 과징금을 내는 것이 더 저렴하다. 이 구조를 바꿔야 한다. 매출액의 10%, 20%를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감독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예산과 인력이 부족하다. 수천 개 기업을 감독하기에 역부족이다. 예산을 늘리고, 전문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
ISMS 인증 제도를 실질화해야 한다. 현재 ISMS 인증은 형식적 절차에 그친다. 인증을 받은 기업에서도 대규모 유출 사고가 발생한다. 인증 기준을 강화하고, 사후 점검을 의무화해야 한다.
단체소송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현재 집단소송은 피해자 개개인이 참여해야 한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 단체소송 제도가 도입되면, 소비자단체가 대표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중 어느 것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가? 어느 것이 정부 정책의 우선순위에 있는가? 어느 것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가?
모르겠다. 쿠팡 때리는 뉴스만 보인다.
나도 피해자다. 3,370만 명 중 한 명이다. 분노한다.
그러나 내 분노는 쿠팡만을 향하지 않는다.
쿠팡을 때리면서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언론을 향한다. 청문회에서 호통 치면서 일했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들을 향한다. 집단소송에 참여하면서 뭔가 했다고 만족하는 우리 자신을 향한다.
쿠팡은 잘못했다. 비판받아야 한다.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쿠팡만 때리고 끝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내년에 또 다른 기업에서 정보가 털리면, 또 그 기업을 때릴 것이다. 또 청문회가 열릴 것이다. 또 집단소송이 시작될 것이다. 또 분노할 것이다. 또 잊을 것이다.
도둑이 들었다. 집주인이 문단속을 소홀히 한 것은 맞다. 그러나 도둑을 잡고, 동네 전체의 방범 시스템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집주인을 공개 처형하느라 바쁘다. 도둑은 어디 갔는지 관심도 없다. 방범 시스템은 손대지도 않는다.
이것이 한국식 문제 해결이다. 시스템은 손대지 않고, 광장에 한 명을 세워 멍석말이를 한다.
대중들은 늘 광장에 한 명을 놓고 멍석말이를 즐긴다. 오늘은 쿠팡이다. 내일은 또 다른 누군가가 될 것이다. 광장의 구경꾼들은 박수를 치고, 분노를 쏟아내고, 정의가 실현됐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정의는 시스템이 바뀔 때 실현된다. 다음 피해자가 나오지 않을 때 실현된다.
멍석말이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내 정보도 돌아오지 않는다. 다음 3,370만 명도 막지 못한다.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고, 처벌만 하려 한다. 대중들은 늘 광장에 한 명을 놓고 멍석말이를 즐긴다.
언제까지?
참고자료 및 인용
뉴스 보도
- KBS 뉴스, “‘쿠팡 연석 청문회’ 30~31일 개최…6개 상임위 참여”, 2025.12.23. 링크
- 매일경제, “‘병역 기피’ 유승준처럼…’쿠팡 김범석 입국 금지법’ 나왔다”, 2025.12.20. 링크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시민 620명, 쿠팡 개인정보 유출 집단분쟁조정 신청”, 2025.12.10. 링크
- 중앙일보, “쿠팡 희한한 ‘1인당 5만원’ 보상…쿠팡선 5000원밖에 못쓴다, 왜”, 2025.12.29. 링크
- 한겨레, “쿠팡 알럭스? 뭔지도 몰라…분노 키우는 ‘무늬만 5만원’ 꼼수 보상”, 2025.12.29. 링크
- 한겨레, “김범석, ‘쿠팡 사태’ 29일 만에 마지못해 사과…’청문회 불출석’ 버티기 계속”, 2025.12.28. 링크
- 나무위키, “쿠팡 개인정보 대규모 유출 사건” 링크
청문회 제도 관련
통계 및 정부 자료
- 개인정보보호위원회, “2024년 유출신고 동향 분석”, 2025.03.
-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사이버 침해사고 신고 통계
- 지표누리, 개인정보 침해 신고·상담 건수 통계
판례
- 대법원 2018. 1. 25. 선고 2015다24904 판결 (네이트 개인정보 유출 사건)
- 대법원 2018. 12. 28. 선고 2018다214142 판결 (개인정보 유출 손해배상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