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버린 병원 시계, 악몽이 된 1년
2024년 2월 20일,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발표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집단으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당시 주요 수련병원 100곳의 전공의 55%에 해당하는 6,415명이 사직서를 냈고, 이 중 1,630명은 즉시 근무지를 이탈했습니다.
초기에는 “설마 의사들이 환자를 버리겠어?”라는 낙관론도 있었지만, 이제 의료 공백 사태는 되돌릴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뉴 노멀(New Normal)‘이 되어버렸습니다.
10개월이 지난 2025년 12월 현재, 상급종합병원의 전공의 수는 약 6,800명에서 1,549명으로 5,300명 이상 감소했습니다. 95% 이상의 전공의가 복귀 의사가 없다고 밝힌 가운데, 환자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을 찾아 헤매지만 “받아줄 의사가 없다”는 차가운 거절만 돌아옵니다. 수도권 대형 병원의 수술 예약은 기약 없이 밀려있고, 암 환자들은 항암 치료 일정이 늦어질까 봐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있습니다.
통계로 보는 응급실 대란
가장 치명적인 붕괴는 응급 의료 체계에서 일어났습니다. 심정지 환자가 구급차 안에서 수용 가능한 병원을 찾지 못해 길 위에서 사망하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사고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응급실이 환자 수용이 어렵다고 사전 고지한 건수를 보면 사태의 심각성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2023년에는 5만 8,520건이었던 응급실 수용 제한 고지 건수가 2024년에는 11만 3건으로 약 2배 증가했습니다.
2025년 8월까지 이미 8만 3,181건이 발생하여 연말에는 2024년 수치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됩니다. 명절 연휴 기간에도 응급실 진료 제한 메시지가 전년 대비 70% 증가하는 등 현장의 혼란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2024년에는 응급의학과 전공의들의 사직 비중이 전년 대비 거의 6배 급증했습니다. 응급실의 허리 역할을 하던 전공의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골든타임’이라는 단어는 이제 사어(死語)가 되었습니다. 응급실 문턱을 넘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버린 현실입니다.
정부는 비상 진료 지원을 위해 응급실 전문의 진찰료 수가를 100% 인상하는 등 각종 대책을 내놓았지만, 인력 자체가 부족한 상황에서 수가 인상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빅5 병원 암 수술 29% 급감
전공의 이탈의 충격은 중증 환자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전해졌습니다. 2024년 2월부터 6월까지 전국 상급종합병원의 암 수술 건수는 전년 대비 16.3% 감소했습니다.
특히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가톨릭서울성모병원 등 소위 ‘빅5’ 병원에서는 암 수술 건수가 무려 29%나 줄었습니다.
암 환자들에게 수술 일정이 늦어지는 것은 곧 생존율의 저하를 의미합니다. 똑같은 병기의 암이라도 수술이 2주, 3주 늦어지면 전이 확률이 올라갑니다.
중앙정부 피해신고지원센터에 2024년 2월 19일부터 6월 21일까지 접수된 상담은 3,000건 이상이었으며, 이 중 813건이 정식 피해 신고로 이어졌습니다. 신고 내역을 분석하면 476건(58.5%)이 수술 지연이었고, 179건은 진료 차질, 120건은 진료 거절이었습니다. 환자 피해의 대부분(82.2%)은 전공의 의존도가 높은 상급종합병원에서 발생했습니다.
“수술 예정일이 3주나 밀렸습니다. 그 사이 암세포가 퍼지면 어떡하죠? 저는 죽으라는 겁니까?”
한 위암 3기 환자의 절규는 수만 명 환자들의 공통된 분노를 대변합니다.
지방 필수 의료의 초토화
서울과 수도권의 상황이 이 정도라면, 지방은 이미 ‘의료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방 의료원의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 의료 과목 전문의가 줄줄이 사직하면서 ‘무의촌’ 지역이 도시 한복판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아이가 열이 나도 갈 곳이 없어 새벽부터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타 도시의 병원으로 ‘원정 진료’를 떠나야 하는 부모들이 늘고 있습니다. 분만을 할 수 있는 산부인과가 없어 임신부들이 인근 대도시까지 몇 시간씩 차를 달려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지역 의료의 붕괴는 지방 소멸을 가속화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아이 낳고 키울 수 있는 병원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라는 거냐”며 도시로 떠나고 있습니다.
수술을 거부당한 임신부가 태아를 잃는 사례, 구급차가 병원을 찾지 못해 시간을 허비하다 골든타임을 놓치는 사례가 언론에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제 지방에서는 “중병에 걸리면 서울 가서 죽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나돕니다.
돌아오지 않는 전공의들
정부는 그동안 업무개시명령 철회, 면허 정지 유예, 수련 특례 등 온갖 유화책을 내놓으며 전공의들의 복귀를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2025년 12월 현재, 전체 전공의 복귀율은 여전히 한 자릿수(약 8%)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공의들은 “미래가 없는 한국 의료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요지부동입니다. 번아웃을 호소하며 병원을 떠나는 것을 넘어, MZ세대 의사들 사이에서는 USMLE(미국 의사 면허 시험) 준비반이 성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해외 이주 설명회가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두뇌 유출(Brain Drain)‘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일본, 미국, 중동 등으로 떠나려는 젊은 의사들이 늘어나면서, 한국 의료계의 허리가 끊어지고 있습니다.
전공의가 떠난 자리를 묵묵히 지키던 전문의와 교수들마저 살인적인 업무 강도를 견디다 못해 탈진을 호소하며 병원을 떠나고 있습니다. 한 대학병원 외과 교수는 “전공의가 있을 때는 야간 당직이 일주일에 한두 번이었는데, 지금은 격일로 서야 한다. 체력적으로 한계”라고 토로했습니다.
2026년 교육 대란: 7,500명 동시 수업의 공포
의료 현장의 붕괴보다 더 무서운 시한폭탄이 교육 현장에서 터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2026학년도 의대 교육 대란입니다.
2025년에 수업을 거부하고 유급된 24학번 학생(약 3,000명)과 2026년에 새로 입학하는 25학번 신입생(증원 포함 약 4,500명)이 합쳐져, 무려 7,500명의 학생이 동시에 1학년 수업을 들어야 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확정적입니다. 이는 평년 대비 2.5배에 달하는 규모입니다.
이 많은 학생을 수용할 강의실과 실습 기자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학 본부는 부랴부랴 컨테이너 가건물을 짓고 온라인 강의를 준비하고 있지만, 의학 교육의 특성상 현장 실습 없는 이론 교육은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해부학 실습의 경우, 카데바(기증 시신) 한 구를 10~15명의 학생이 둘러싸고 구경만 하다 끝나는 관광 실습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의대 교수들은 “이런 환경에서는 정상적인 교육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합니다. 교육의 질 저하는 필연적이며, 이는 결국 실력이 부족한 의사들이 배출되어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입니다.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부실 교육으로 등록금만 날리게 생겼다”며 대규모 등록금 반환 소송과 수업 거부 투쟁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의사 배출의 단절과 잃어버린 5년
2025년 치러진 제90회 의사 국가시험(국시) 실기시험 응시자는 대상자 3,400여 명 중 382명에 불과했습니다. 응시율이 11% 수준으로 폭락한 것입니다. 이는 2026년에 배출될 신규 의사 면허 소지자가 평년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규 의사가 없으면 인턴(수련의)을 선발할 수 없습니다. 인턴이 없으면 레지던트(전공의) 1년 차도 없습니다. 이렇게 의료 인력 공급의 파이프라인이 끊기면서 향후 4~5년간 전문의 배출이 중단되는 인력 공백(Void) 구간이 발생하게 됩니다.
당장 2025년부터 군의관과 공중보건의(공보의) 수급에도 비상이 걸렸습니다. 군 의료 체계와 농어촌 의료 시스템이 붕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병원들의 재정 파탄
환자가 줄어든 병원들의 경영난은 심각합니다.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등 소위 ‘빅5’ 병원조차 하루 수십억 원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5년 상반기에만 주요 상급종합병원의 누적 적자가 1조 원을 넘겼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병상 가동률은 50%대로 떨어졌고, 장례식장, 주차장 등 부대 사업 수입마저 급감했습니다.
지방 사립대 병원들의 상황은 더 심각해 임금 체불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일부 병원은 직원 무급 휴직을 강요하거나 희망퇴직을 받고 있으며, 병동을 폐쇄하고 통폐합하는 등 고육지책을 쓰고 있습니다. 병원이 도산하면 지역 경제에도 타격이 클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의 건강권이 송두리째 위협받게 됩니다.
정부와 의료계의 치킨 게임
정부와 의료계의 입장은 1년 넘게 단 한 발짝도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의료 개혁의 핵심인 2,000명 증원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강경론을 고수하고 있고, 의료계는 “과학적 근거 없는 증원을 백지화하지 않으면 대화는 없다”며 맞서고 있습니다. 양측 모두 명분에 갇혀 실리를 챙기지 못하는 최악의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상호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점입니다. 의료계는 정부를 “의사를 악마화하고 탄압하는 독재 권력”으로, 정부는 의사들을 “기득권 지키기에 혈안이 된 카르텔”로 규정하고 비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 중재자가 나서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K-의료 시스템의 미래는?
전문가들은 이 사태가 장기화되면 한국의 자랑이었던 건강보험 중심의 공공 의료 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대학병원과 공공 병원이 제 기능을 못 하면, 환자들은 비급여 진료 위주의 민간 병원이나 영리 병원으로 몰리게 됩니다. 이는 의료비 상승과 의료 불평등 심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의료 공백을 틈타 실손보험사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비급여 시장이 팽창하면서 민간 자본이 의료 시장을 잠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돈 있는 사람은 더 좋은 서비스를 받고, 돈 없는 사람은 치료받지 못하는 ‘의료 민영화’의 디스토피아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저비용 고효율을 자랑하던 ‘K-의료’ 시스템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우세합니다. 3분 진료, 박리다매식 진료 관행, 필수의료 저수가 등 고질적인 문제들이 이번 사태로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없이는 한국 의료의 미래는 없습니다.
마지막 골든타임: 2026년 봄을 위하여
2026년 3월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 이번 겨울이 마지막 골든타임입니다.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한 발짝씩 물러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정부는 2026년 정원 조정 가능성을 열어두고 진정성 있는 대화 제스처를 취해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필수의료 지원’이 아니라, 현장의 의사들이 체감할 수 있는 획기적인 수가 인상과 법적 보호 장치 마련이 시급합니다.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 전공의 연속 근무 시간 단축, 수련 비용 국가 지원 의무화 등 구체적인 당근책을 법제화하여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의료계는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한 극단적인 투쟁 방식을 철회하고 협상 테이블로 돌아와야 합니다. 의사들은 “정부가 우리를 악마화했다”고 주장하지만, 국민들은 “환자 버린 의사를 어떻게 지지하냐”며 냉소적입니다. 엘리트주의와 특권 의식에 젖어 있다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국민의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환자들이 병원 밖에서 죽어가는 비극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이제 스스로 건강을 지켜야 하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으니 제발 아프면 치료받게 해달라”는 것이 국민들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2026년 봄에는 캠퍼스에 학생들이 돌아오고, 병원에 의사들이 돌아와, 환자들이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당연한 일상’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프지 않는 것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되어버린 2025년 대한민국의 서글픈 자화상입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